전국 폐의약품 수거함 지도 정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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버전 : 3 / 2025-01-14 03:00:10
났다는 후기ㅠㅠㅠ 그리고 하나록산 노래를 너무 안정적으로 잘해서 놀랐고 진짜 너무너무 귀가 황홀했음!!! 준혁 크리스티앙 잘생겼고 + 졸귀였고 하루 또 하루 부르는데 넘 안쓰러웠음 진짜 가지마 시라노 (자둘자막) 왕왕왕 그 바뀌었다는 넘버는 중독성 쩔고 너무나 내 취향이었음 박제 안주시나요ㅠㅠ 지수 록산...
이건 우리의 이야기(2025-03-09 23:40:00)
유여사네 영수까지 딱복 주문 열심히 해먹고 물복은 엄마빠네 복숭아먹으려고 했는데 올해 복숭아 망했다고한다 하하하. Previous image Next image 남편 약속있어서 오랜만에 혼밥한 날 쫄면이랑 아빠표 베이컨으로 매운맛을 중화시켜줄 베이컨볶음을 했는데 찍먹소스가 핫스리라차 비주얼 마치 뭐같은데 맛은...
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(2024-09-03 08:00:00)
요즘 경로당은 일흔 살 먹은 어린애들이 들어와서 문제야 나 : ( ) 이제 가을?아닌?가요? 기온이?왜? 아빠 차 타고 산소도 다녀왔는데 와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 뻘뻘 흘림 이게 날씨냐 우리 귀엽고 에너지 넘치는 사촌동생 애기들… 아프지 말거라 배트맨 놀이 하다가 넋놓고 동물농장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...
˚ෆ*₊(2024-09-20 21:45:00)
가장자리가 흰색 막질이다. 국화방망이는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인데 산국 감국 같기도 한데 야생화는 참 어렵다.. 김재로(金在魯 : 1682~1759)는 조선 후기 숙종부터 영조 때까지 10여년에 걸쳐 영의정을 3번이나 지냈고 노론의 선봉에서 영수적인 구실을 하였는데 박문수(朴文秀)와 이종성(李宗城) 등을 파직하게...
바람에 구름 가듯(2020-10-14 16:09:58)
조선후기 유학자 윤원거(1601 ~1672)의 묘와 묘비.계룡산이 정면에 보인다. 윤원거는 명재고택(구 윤증선생 고택)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10살 위 사촌형이다...모습. 우로 가며 노성산,감바위산을 보며 간다. 09 ; 48. 금대2구 마을회관과 경로당과 버스정류장. 도로 확포장공사장이 계속된다. 10 ; 09. 경천중학교와...
산경표를 따라서(2016-11-27 08:08:52)
조선 후기 세시풍속 서적인 '홍석모'의 <동국세시기>나 '유득공'의 <경도잡지> 등에도 <토정비결>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결정적 이유라고 합니다. [토정비결]=[토정 이지함]이라는 등식은 증거가 없어 사실여부가 불확실한 사항입니다. ['소금 배급'] 앞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<토정선생>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고기...
홍어와 무인도(2021-01-11 08:57:14)
조선 후기 1896년(고종33)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풍기군 와룡면(臥龍面) 엄현동(奄峴洞)이 됐다. 1914년 일제(日帝)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봉현면 오현리에 속했다가 해방 후 오현2리로 분리됐다. 김영진(61) 이장은 “오현2리는 엄고개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자갈모래이, 서로는 독직골에 이르고 있으며, 사과...
초암 이야기(2017-11-29 16:17:32)
2리 경로당~강릉학산오독 떼기 전수관 ~굴산사지 당간지주 이정표 주변 주차(당간지주 앞 주차 공간 없음. 회차공간은 있음)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 사이의 깃대 받침이나 기단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다.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,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...
oh! Nary(2015-01-22 17:00:00)
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김장쟁(金長生)ㆍ김집(金集) 이후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쳐 기호학파를 이끌면서 서인ㆍ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다. 이 비석은 우암(尤庵) 선생이 이곳에 잠시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정조 3년(1779년)에 정면과 측면 각 1칸의...
Sheenbee의 느린 걸음 이야기(2022-11-18 23:13:00)
조카 영수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. 다음 해(1931년) 봄,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퇴학당하였다. 매형의 주선으로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다 광부들과 어울려 술만 마시다 건강이 더 악화한 상태로 몇 달만에 고향 실레마을로...
존재의 따스함(2011-08-14 00:05:09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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